올가 토카르축(Olga Tokarczuk)의 「방랑자들 Bieguni」을 읽고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작가 올가 토카르축(Olga Tokarczuk, 1962)의 장편소설 <방랑자들 Bieguni>입니다. 당시 노벨문학상 수상 이유로 '해박한 열정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 책에 딱 들어맞는 묘사입니다.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체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라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다가 3분의 1 지점에서는 여기저기 끌리는 대로 순서 없이 읽었습니다.
책은 마치 여행 철학 또는 여행기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주제는 전 생에 걸처 방랑하는 주체인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고찰입니다. 형식으로 보면 <방랑자들>은 파편화된 글입니다. 떠남, 여행, 방랑을 소재로 한 100여 편의 에피소드는 모두 각각의 소제목을 갖고 있으며 다중 화자, 심지어 사물이 화자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중편소설처럼 긴 이야기도 있고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도 있으며 서간문, 강연록 등 장르도 제각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조각들은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 <방랑자들>은 '공항에서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서로 마주치고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유사합니다. 수십, 수백의 사연들이 떠나기 위해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이죠. 아주! 정확한 설명입니다.
소설 <방랑자들>의 앞부분에서는 올가 토카르축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 자전적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그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단지 방랑이라는 것이 저자와 깊은 연결고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식의 삶이 맞지 않았다. 어딘가에 일정 기간 머물다보면 금방 그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유전자가 내게는 없었다...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_「머릿속의 세상」
한 곳에, 하나의 생각에, 하나의 가치에 머물지 말고 계속해서 재고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라는 조언으로 들립니다. 고인물이나 구르는 돌에 관한 격언이 떠오릅니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_「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순례자는 통상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용어입니다. 진정한 순례자, 진정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단상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겨우 다섯 줄이 전부입니다.
그는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곁에 없으면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과연 진정한 순례자가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_「순례자의 성향」
모두가 각자의 방랑을, 여행을, 순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서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올가 토카르축은 희망적인 예언을 남깁니다.
이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공중 도로를 날아서 새로운 세계로 향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_「탑승」
<방랑자들>은 살아가며 방랑하는 것이 단지 나 뿐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혜로운 방랑법까지 공유해주고 있으니 더없이 친절한 작품입니다.
<방랑자들>에 수록된 100여 개의 에피소드 중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올가 토카르축은 이 소설 <방랑자들>에 대해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는 말을 했는데 저자가 지향하는 이 가치가 잘 드러나는 문장입니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
_「보는 만큼 안다」
저의 순례길에 찾아와 준 올가 토카르축의 책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24.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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