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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폰의 체스ㅣ파올로 마우렌시그 Paolo Maurens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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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폰의 체스 La Variante di Luneburgㅣ파올로 마우렌시그 Paolo Maurensig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마우렌시그(Paolo Maurensig, 1943-2021)의 데뷔작인 1993년 출간된 <폰의 체스, La Variante di Luneburg>입니다. 파올로 마우렌시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 골동품 악기 복원가를 포함한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50세에 처음 발표한 이 소설로 문단의 극찬을 받습니다. 

 

<폰의 체스>는 체스 천재인 유대인 프리슈와 독일 귀족 타보리의 상상치 못할 판돈이 걸린 일생일대의 체스 게임에서 비롯됩니다.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화자를 오가는 독특한 형식의 스릴러 소설이라는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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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됩니다.

 

체스의 발명은 유혈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체스 발명자의 도를 넘는 탐욕은 사실 체스 게임 자체의 탐욕과 닮았다.

 

체스 선수는 역설적이게도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에 멈춘 시간을 맛본다. 단언하건대 체스 선수는 게임에 정신을 집중했을 때만큼은 권태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성공한 사업가인 유대인 디터 프리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수용소에 온 가족이 끌려갑니다. 그의 부모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고 프리슈는 '체스 특기자'로 뽑혀 독일군 타보리와 체스를 두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갑자기 내가 보고 겪었던 모든 일이 짓궂은 장난이었고 돌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어떻게 죽음을 모면했는지 궁금할 겁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특기를 높이 평가하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을 잘 알 겁니다." _타보리

 

 

당시 체스는 유대인 박해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독일인은 '유대인 체스'보다 '아리안 체스'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프리슈는 몇 차례 독일군 타보리에게 일부러 져줍니다. 그러나 뒤늦게 체스 게임의 판돈에 대해 알게 되고 잔혹한 그들의 행위에 의도치 않은 공모자가 되고 맙니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 <폰의 체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싶다면 높이 올라가 보면 된다. 전망이 바뀌면서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동정, 자비, 사랑은 상대적이고 우연한 상태이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게임 중에 희생된 체스 말에 대해 사랑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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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같이 체스를 둔 독일군 타보리는 자신의 체스 제자인 한스 마이어에게 프리슈와의 일화를 들려주고 그를 수소문해 찾아주길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작은 봉투를 하나 건네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오직 프리슈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한 메시지입니다. 

 

봉투에는 "잘 생각해 보게."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접힌 신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뒷면에 "만일 이 사고가 자네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났다면 어떻게 하겠나?"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타보리가 프리슈를 찾고 싶어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료? 혹은 적? 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일까요. 같은 양심의 가책을 갖게 된 동지를 보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프리슈는 68세가 되던 해에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거친 천 조각을 꿰매 만든 이상한 체스보드와 단추로 만든 체스말들만이 책상 위에 유서처럼 놓여있었습니다. 

 

동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다고 스스로를 속일 순 있어도, 신과 내 양심 앞에서는 내가 동포들의 목숨을 걸고 체스를 뒀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은 내 기억과 양심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_프리슈

 

참회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던 프리슈, 의도하지 않았으며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게임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도 참회하며 살았습니다. 과연 그때 게임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그에게 있었을까요. 


2024.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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