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림 비용 The Cost of Livingㅣ데버라 리비 Deborah Levy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 데버라 리비(Deborah Levy, 1959)의 자전적 에세이 <살림 비용 The Cost of Living>입니다. 이 작품은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자유를 찾기 위해 적잖은 '대가(the Cost)'를 지불하고 분투하며 자신을 살아내는(Living) 중년의 데버라 리버가 주인공입니다.
내 배역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데는 어떤 비용이 따르려나? _본문 가운데
처음 도서관 서가에서 초록색의 작은 책 <살림 비용>을 봤을 때 어느 프랑스인의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살림 비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책을 열어 훑어보는데 인쇄된 활자도 모두 초록색입니다. 2021년에 출간한 책인데 표지도 내지도 빳빳한 걸 보면 베스트셀러는 아닌가 보다 하고 다시 표지를 보니 'The Cost of Living', 그제야 영문 제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자인 데버라 리비는 어렸을 적부터 예민한 성정에 관찰력이 뛰어났습니다.
'..... 그 아이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질, 느닷없이 부리는 성질머리, 동작 하나 놓칠세라 사람을 빤히 바라만 보는 그 비정상적인 시선!' 이는 내 어머니가 나에 대해 느낀 감정이기도 하다. _본문 가운데
데버라 리비는 40세 무렵 이혼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있는 여성이 가정생활을 내려놓는 일은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는 <살림 비용>에서 '내 삶의 기력을 어지간히 바쳐 지은 가정을 내 두 손으로 허물고 있는 셈'이라는 말로 자신의 결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_본문 가운데
<살림 비용>에서는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의 말을 여러 곳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늘 긍정적이고 추앙하는 표현만 가득한데 뒤라스의 <살림살이 La Vie materielle>에서는 '어머니'에 관한 가히 선구자적인 정의를 내놓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란 존재는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즉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 뒤에 오는 생애 전체에 걸쳐 광기를 상징한다. 우리의 어머니란 우리가 만난 사람 중에서 언제나 가장 희한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_마르그리트 뒤라스 <살림살이> 가운데
이런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데버라 리비는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상상해 온 인물이 되는 건 자유가 아니다'라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두려움에 우리 삶을 저당 잡히는 일'이라는 말로 우리 스스로에게 맞는 진정한 자유에 관해 함께 사유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살림 비용>에는 데버라 리비가 경험한 크고 작은 '삶'의 '비용'들이 언급됩니다. 예컨대 글을 쓰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 욕실 세면기 배관을 뚫고, 세면기 아래쪽에 양동이를 받쳐둬야 합니다. 또한 데버라 리비는 책의 마지막에서 약간의 위트를 발휘해 자칫 그냥 넘길 뻔한 독자를 위한 자신의 '살림 비용'을 고지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삶의 비용으로 만든 글이며 디지털 잉크로 만들어졌다. _본문 가운데
'살림 비용'을 치르며 자기만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데버라 리비, 그리고 나름의 '살림 비용'을 조용히 감당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응원합니다. 저 포함.
2023.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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