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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좀머 씨 이야기ㅣ파트리크 쥐스킨트, 그가 쉼 없이 걷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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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머 씨 이야기ㅣ파트리크 쥐스킨트, 그가 쉼 없이 걷는 이유 (열린책들)


소설 <향수: 살인자의 이야기, 1991>로 잘 알려진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의 <좀머 씨 이야기 Die Geschichte des Herrn Sommer , 1991>입니다. 서정적인 동화 느낌이 나는 표지와 책 제목, 삽화에도 불구하고 <향수>의 잔향이 아직도 남아 긴장 섞인 기대로 책을 열어봅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 중 한명인데 그런 그를 '은둔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문학상을 거부하고 당연히 사진 찍히는 것도 피하고 있습니다. 독자로서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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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의 삽화를 그린 장 자크 상페(Jean Jacque Sempe, 1932-2022)는 그림책 <꼬마 니콜라, Le Petit Nicolas>로 유명한데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책 작가를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어딘지 괴짜스러운 느낌으로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장 자크 상페 특유의 그림체는 지금 봐도 좋습니다.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가던, 모든게 새롭고 흥미롭던 어릴 적 기억은 매우 또렷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좀머 씨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만난 특이한 아저씨에 관한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좀머 아저씨는 긴 지팡이를 들고 탁탁탁 소리를 내며 새벽부터 밤까지,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쉬지 않고 잰걸음으로 마을을 걷고 또 걷는 '이상한 아저씨' 입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왜 그렇게 하루 온종일 걸어 다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기심에 추측만 할 뿐. 

 

 

어른의 시각과 아이의 시각은 판이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 주인공의 눈에 비친 좀머 아저씨는 어땠을까요. 이웃의 오랜 고통보다는 당장 내 집의 수전 고장난 게 더 마음이 쓰이는 어른과는 분명 다를 겁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도 좀머 아저씨는 우산도 없이 지팡이를 짚고 어딘가로 달아나듯 걷고 또 걷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차를 곁에 세우며 타라고 여러 번 채근하고 마침내는 "어서 타시라니까요 글쎄! 몸이 흠뻑 젖으셨잖아요! 그러다가 죽겠어요!"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좀머 아저씨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저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_「좀머 씨 이야기」 본문 가운데

 

평소 어눌한 말투의 좀머 아저씨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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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떤 연유로 어린 주인공은 죽기로 결심하고 벼랑 끝의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운명과도 같이 나무아래 막 도착한 좀머 아저씨를 마주칩니다. 주변을 경계하며 가방에 든 빵을 욱여넣다시피 먹고 어딘가 불편한지 잠시 쉬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잰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던 좀머 아저씨, 그에게는 하루종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걷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연이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깟 코딱지 때문에 자살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_「좀머 씨 이야기」 본문 가운데

 

아이의 눈에는 좀머 씨의 고통이 고스란히 보였습니다. 일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매일 잰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좀머 아저씨의 모습이 어린 주인공에게 각인됩니다.   

 

 

좀머 씨가 죽던 날 어린 주인공은 유일한 목격자가 됩니다. 주인공은 좀머 씨를 부를 수도, 이웃의 도움을 구할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침묵한 채 좀머 씨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이후 좀머 아저씨의 행방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지만 주인공은 좀머 아저씨의 죽음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좀머 아저씨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_「좀머 씨 이야기」 본문 가운데

 

일생을 두려움과 고통 속에 살았고 그대로 죽어버린 좀머 씨의 삶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또 무엇인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이 <좀머 씨 이야기>의 배경이었다고 하니 그는 전쟁과 관련한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누군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좀머 씨와 같은 '조금 다른' 이웃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 건 아닌지도 돌아볼 일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세상을 향해 하는 말인 듯도 합니다. 


2023.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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