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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일방통행로 Die Einbahnstraßeㅣ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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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방통행로 Die Einbahnstraßeㅣ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새물결) 


1928년 출간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일방통행로, Die Einbahnstraße> 입니다. 이 책은 특이한 구성으로 유명한데 단편적이고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따라가는 100개 이상의 문학적-철학적 미니어처가 포함돼있습니다. 수많은 중간 소제목으로 나뉘며 많은 격언이 실려 있습니다. 명확한 순서를 인식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형식을 현대 초현실주의 몽타주 프로세스와 연결 짓기도 합니다. <일방통행로>는 발터 벤야민이 일생 동안 출판한 거의 유일한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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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은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뮌헨, 베를린 대학 등에서 공부했습니다. 문학, 정치, 영화, 미술, 철학 전반에 걸쳐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사유의 길을 낸 철학자입니다. '20세기 가장 빼어난 산문가, 핵심적인 사상가'라는 영예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삶은 고난과 불운, 실패와 미완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향하던 중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계단주의!' 라는 소제목을 단 글쓰기에 관한 단상입니다. 계단과 글쓰기란..? 어떠한 연상작용의 결과물일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좋은 산문을 쓰기 위한 작업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

_「일방통행로」 본문 가운데

 

 

'표준시계' 라는 소제목 아래에는 위대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표준시계'의 상징을 추측할 수 있겠지만 조악한 추측을 글로 적을만한 가치는 없을 듯합니다. 느낌만! 천재의 근면성에 대한 것은 독일의 작가 폰타네(1819-1898)가 화가 멘첼(1815-1905)에 대해 "근면이 비로소 천재를 만든다"라는 말을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주석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재에게 있어서는 모든 중간 휴식이, 또 운명의 무거운 타격조차도 편안한 잠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실 자체의 근면함 속으로 떨어진다. "천재는 근면하다."

_「일방통행로」 본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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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 인용문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통찰이 굉장합니다. 인용문을 노상강도에 빗댄 것은 무심히 글을 읽다 느닷없이 웃음이 터질 만큼 완벽한 비유입니다. 최근 강신주 철학자의 <감정수업>을 읽으면서 스피노자의 인용문이 이 책의 본론을 잠식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노상강도와도 같은 인용문은 작가에게 '주의요망' 항목입니다. 

 

내 글 속의 인용문들은 노상강도 같아서 무장한 채 불쑥 튀어나와 여유롭게 걷고 있는 자에게서 확신을 빼앗아버린다.

_「일방통행로」 본문 가운데

 

 

필사의 가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것은 글 위를 자유롭게 떠돌며 읽는이의 자아를 따라갈 뿐이지만, 그 텍스트를 베껴 적는 것은 글 속의 빽빽한 원시림 사이로 난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그것을 일컬어 '필사한 사람의 영혼에 호령'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중국의 서적 필사 전통을 높이 평가하며 사본이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 글의 소제목은 '중국 도자기 공예품'.

 

 

'안경점'이라는 소제목 아래에는 짧은 경구들이 마치 시의 행처럼 나열돼있습니다.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읽다 보면 '맞네.. 정말 그렇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발터 벤야민의 관찰력과 통찰의 수준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인간의 인식, 특별히 시각을 통한 인식이 얼마나 믿을만한 게 못되는지 또 한편으로는 주변 환경과 전후 맥락이 인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 '시선이 인간의 찌꺼기'라는 표현이 '안경점'이라는 소제목과 이어질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여름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눈에 잘 띄지만 겨울에는 마른 사람들이 눈에 잘 띈다.

 

봄, 밝은 햇빛 아내서는 어린 잎이, 차가운 빗속에서는 채 잎이 달리지 않은 가지가 눈에 띈다. 

 

야회가 어떠했는지를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접시와 컵, 잔과 음식들의 위치를 보고 한눈에 알 수 있다. 

 

시선은 인간의 찌꺼기이다. 

 

_「일방통행로」 본문 가운데

 

 

발터 벤야민은 나중에 <일방통행로>에서 사용된 문학적-철학적 미니어처 형식에 대해 '정신적 이미지'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사유가 몽타주적 글쓰기와 절묘하게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진을 찍듯 문장 하나하나가 관계로 부터 독립된 격언처럼 가치 있는 글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40대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지 않고 이러한 문장을 조금 더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2023.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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