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정수업ㅣ강신주, 스피노자를 통해 본 인간의 48가지 얼굴 (민음사)
가끔 어떤 감정을 마주쳤을 때 그 감정에 대해 정확히 정의할 수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난다, 짜증 난다, 슬프다, 우울하다 등의 표현 안에 수백 가지 복잡한 감정을 대충 범주화해서 넣고 사용합니다. 강신주 철학자(1967)의 <감정수업>에서는 48가지 인간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8가지 감정은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의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데 1677년 간행 된 그의 유작이자 대작 <에티카, Ethica>에서 '감정의 윤리학'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감정, 익숙한 조합은 아닙니다. 철학은 오히려 감정보다 이성과 어울리는 개념이라 여겨왔는데 강신주 철학자는 인간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며 잃어버린 감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독자들에게 <감정수업>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죽이는 기술을 얻었다는 것..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별로 기억나는 추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감정이 움직여야 기억나는 것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_「감정수업」 프롤로그 가운데
책의 에필로그를 보면 저자 강신주 철학자가 프롤로그에서 감정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성보다 중요하다고 한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대부분 이성의 판단 기준을 따라 선택을 내립니다. 주변인들의 말을 참조하고 내 과거와 미래를 고려합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죽은 선택'입니다. 매 순간 현재의 감정을 따르는 것이 자기 다운 선택이며 '살아있는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성)의 행동 준칙은 선과 악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감정)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과 나쁨이다. _「감정수업」 에필로그 가운데
강신주 철학자가 설명하는 48가지 감정 가운데 인상적인 몇 가지를 꼽아봅니다. 후회에 관한 해석인데 스피노자의 정의가 먼저 나오고 강신주 철학자가 그에 대해 부연합니다.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방점을 찍을 부분이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이라며, '이보다 더 큰 오만이 있을까?' 라며 되묻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후회할 수도, 후회할 필요도 없는 존재일까요. 그렇다면 선택을 할 때 좀 더 자유로워도 될지, 혹은 자유롭다는 것 조차 우리의 착각인 건지.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_「에티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부분은 '감사', '대담함', '공손함'이라는 감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세 감정의 공통점은 바로 욕망 혹은 노력이라는 것인데 결코 곧바로 '기쁨'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다만 강신주 철학자의 설명대로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라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감정은 기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들 긍정적 감정 트리오의 배후를 알고 나니 몰래 숨겨오던 마음을 들킨 듯 머쓱하기까지 합니다.
감사(gratia)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대담함(audacia)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공손함(humanitas)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_「에티카」에서
<감정수업>의 유능한 강사인 스피노자와 강신주 철학자, 스피노자의 철학적 사유의 비범함과 그것을 찾아낸 강신주 철학자의 혜안에 감사(!!)합니다.
2023.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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