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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헛디디며 헛짚으며ㅣ정양 시집, 일상의 익살·헛된 것에 대한 힐난 (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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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헛디디며 헛짚으며ㅣ정양 시집, 일상의 익살·헛된 것에 대한 힐난 (모악)


점심 먹고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봅니다. 태풍이 지나가서 기온이 좀 내려가길 기대했는데 잠시 물러났던 뙤약볕이 꺾이지 않은 기세로 다시 내리쬐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 읽으려고 빌려 둔 정양 시인의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를 집어듭니다. 시집 제목을 보고 서가에서 뽑아들었는데 다시 봐도 탁월합니다. 헛디디고 헛짚고, 좌충우돌 제 인생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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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에 정양 시인에 대한 문태준 시인의 소개 글을 읽어봅니다. "정양 선생님의 시는 몸살을 앓고 난 후에 얻은 시다. 영혼이 앓아누운 자리에서 얻은 것이어서 시구 곳곳을 따라 읽을 때 온몸이 쑤신다. 그러나 싱긋빙긋거리게 하는 익살 또한 있다. 농이 넘친다. 세상의 헛것들에게 거는 힐난이 날카롭다. 답답하던 가슴에 펑 구멍이 뚫린다. 거참, 시원하다." 이 시집을 이렇게 잘 묘사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감히 더 붙일 말씀이 없습니다. 

 

 

'싱긋빙긋거리게 하는'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요즘 시가 더 좋아집니다. 정양 시인의 시도 한편 한편 다 좋습니다. <그게 그거라고> 음.. 정말 그게 그거인데 말이죠. 

 

그게 그거라고 

 

아무도 안 만나고

아무 짓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아무 데서 아무나 만나

아무 말이나 안 가리고

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어느 게 다행이고 

어느 게 불행인지

어느 게 더 만만하고

어느 게 더 군색한 건지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들이

그게 다 그거 아니냐고

살똥스레 저물녘을 끼룩거린다

 

'살똥스레'라는 단어를 처음 보는데 모양도 어감도 너무 귀엽네요. 사전을 찾아보니 '말이나 행동이 독살스럽고 당돌하게'라는 부사어입니다.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철새가 살똥스레 그게 그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는 모습을 연상하니 웃음이 납니다. 

 

 

시 <부자 되세요> 역시 비슷한 깨달음을 줍니다. '부자 되세요, 건강하세요, 오래 사세요, 편안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만만한 인사말에 대한 단상입니다. 

 

(...)

이 모진 세상에 부자로 편안하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만만한 일인가

(...)

비아냥거리며 자꾸 눙치는 것 같다

부자되세요부자되세요부자되세요

등 뒤 숲에서 매미들이 끈질기게 맴맴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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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슈발>이라는 시는 꼭 저희 아버지와 어렸을 적 조카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쁜 말, 고운 말만 가르치려는 자식 내외가 영 내키지 않은 할아버지가 엉뚱한 표현을 손주에게 가르칩니다. 당연히 며느리는 질색하고 손주도 삐죽 대지만 그것마저 재미있는 괴짜 할아버지입니다. 

 

(...)

자식에게 예사로 경어를 쓰는

아들 녀석 말투 때문에 

할아버지 마음이 내내 편하지 않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서 세 살짜리 손자에게

현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야이 씨팔 문 안 열래?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문 여는 법을 알려준다

손자는 시키는 대로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시키지 않아도 거듭 걷어차며 외친다

 

질색하며 나온 며느리가

제 아들을 껴안고 황급히 들어간다

잠시 후 손자가 다시 와서

할아버지 대학교수 맞냐고

앵무새처럼 쪼아린다

 

 

마음에 정말 쏙 드는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합니다. 제목은 <더 낮은 곳으로> 입니다. 

 

(...)

아무리 둘러봐도

아득한 이 광야에

 

흘러야 할 높낮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흘러야 할

낮은 데가 끝끝내 있다고

 

낮은 데마다 보아란 듯이

젖은 황사를 채우면서

 

하늘도 구름도 다 등지고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누런 손자락으로

이 세상을 더듬고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누런 손자락으로 이 세상을 더듬고 있다', 광야에서 이런 시를 발견해 낸 시인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놀라 고개만 크게 끄덕입니다. 이 세상에는 흘러야 할 낮은 데가 '끝끝내' 있다. 정양 시인의 시에는 소금 역할을 하는 단어 하나씩이 꼭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23.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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