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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여행자>를 읽고ㅣ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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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출신 유대계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Ulrich Alexander Boschwitz, 1915-1942)가 1938년 발표한 소설 <여행자 Der Reisende>입니다. 저자가 스물세 살 때 쓴 그의 대표작으로 나치 독일이 유대인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가 약 4주 만에 써 내려간 이 작품은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홀로코스트 증언문학(고발문학)의 시초가 됩니다.  

<여행자>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은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로 평범한 독일 시민으로 살아오다 나치의 박해로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인물입니다. 해외로 이주할 기회를 놓쳐버린 질버만은 재산을 모두 정리한 돈 180마르크를 여행가방에 담아 전국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기차 티켓을 끊어 독일 전역을 배회하는 도망자가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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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여행자> 질버만에게 탈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느곳도 안전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나치 독일을 살아가는 유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상징합니다. 소설 내내 질버만은 기차를 타고 내립니다. 그것만이 붙잡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될 위험을 막아줄 것 같습니다. 

<여행자>는 국가에 의해 일순간 '선택된 민족'으로 낙인찍힌 한 인간의 공포심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을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관심이 없습니다." (p30)

당면한 현실만으로도 벅찬 독일인들은 객관과 중립이라는 미명아래 유대인 박해라는 불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이것은 결코 무관심이 아니라 피해자들을 향한 또 다른 무력행사임을 역사는 인정합니다. 

"모두 오래전부터 알던 지인이었어요. 저쪽은 모두 예전 친구인데 당신은 홀로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그들 중 한 명을 만나면 그가 모른 척하는 모습을 안 보려고 당신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고 말이지요. 같이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당신이 형체도 없는 공기가 된 겁니다. 나쁜 공기요!" (p170-171)

그냥 한 명의 독일 시민으로 살고자 했으나 시대는 유대인이라는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해버립니다. 단순한 차별을 넘어 사회가 어떻게 한 개인을 집어삼킬 수 있는가를 <여행자>는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민해진 질버만은 모든 것에서 잔인한 냄새를 맡게됩니다.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던 그의 삶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잔인한 분류 앞에 실체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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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 나는 안전해. 지금 움직이고 있잖아. 도주 중.. 도주 중.. (p215)

<여행자>가 되어버린 질버만을 괴롭히는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생각입니다. 멈출 수 없는 생각의 고리는 극도의 공포에 몰린 인간을 쉬지 못하게 합니다.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했다가 누군가를 원망했다가 스스로를 자책했다가를 끝없이 반복합니다. 

기차에 유대인이 너무 많군.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들 때문에 내가 불행 공동체에 빠져버렸잖아! 나는 보통 독일 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어. 당신들과 다르다고. (p251)

외모만 보면 전형적인 아리아인인 유대인 질버만은 기차에서 마주치는 유대인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외모까지 전형적인 유대인들과는 다른 존재라며 혐오하는 말을 중얼거립니다. 

 

영원히 이런 식으로 계속 될까? 여행하고. 기다리고. 도주하고?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지? 왜 나를 붙잡고 체포하고 때리지 않을까? 나를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가 거기 서 있게 만드네 (p295)

1938년 <여행자>를 집필하던 스물 세살의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당시 벨기에 망명 중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The Man Who Took Trains(193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영국에서는 The Fugitive(1940)로 출판됩니다.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얼마 후 절판됩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 이 책이 재발견되어 재출판되었고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습니다.  

 

<여행자> 속 질버만은 지인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지만 소설 <여행자>는 9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분명한 목소리로 당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는 진실을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2025.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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