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2008)의 실험적 문학작품 <질투 La Jalousie>입니다. 1957년 작품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벗어나 오직 아내를 관찰하는 한 남자의 시선만을 집요하게 뒤쫓고 있습니다. 사건이나 인물 배경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어 독자 역시 나름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해 작품을 해석해내야 합니다.
그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사물의 외형, 공간의 배치, 반복적 관찰을 통한 객관적 세계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석보다 중립적인 시선에 집중합니다.
알랭 로보그리예의 <질투>는 당시 전위적인 작품으로 인식되며 반소설이라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누보로망(Nouveau roman, 신소설)이라는 조어가 생겨났으며 이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언어의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배경이 프랑스 식민지로 보이는 아프리카 어느 지역이라는 것과 그곳에 살고 있는 화자와 그의 아내 A, 그리고 이웃에 사는 프랑크와 그의 아내 네 사람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질투>의 첫 문장입니다.
지금 기둥ㅡ지붕의 남서쪽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ㅡ의 그림자는 기둥 밑에 맞닿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다. (p7)
집의 구조와 현재 외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한 낮이라는 시간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내 화자는 아내 A를 봅니다. 더위를 타지 않고 추위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검은 머리 타래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녀를 치밀하게 관찰합니다.
사실 주인공 남자는 아내 A와 이웃 남자 프랑크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습니다. 이 <질투>라는 감정선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죠. 독백과도 같은 화자의 편집증적인 중얼거림이 이 소설 <질투>의 서사를 끌어갑니다.
<질투>의 화자는 당연히 아내 A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내 A를 집요한 시선으로 뒤쫓고 프랑크와 함께 있는 모습도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듯 관찰합니다.
A와 프랑크가 동시에 각각 차의 양쪽 앞문에서 내린다. 두 인물은 자동차의 보닛 앞에서 서로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은 동시에 똑같이 미소 짓는다. 그렇다. 그들은 조금도 불편한 데가 없다. (p136)
테라스 그림자의 이동, 창박으로 보이는 바나나 나무 그늘의 움직임, 식탁 위 접시의 배치와 얼룩, 프랑크와 아내 A의 몸짓과 표정 등을 지켜봅니다. 그 모든 현상 속에 화자의 <질투>가 스며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어쩌면 <질투>와 같은 시선이 우리 각각의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실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기쁠 때 세상 만물이 모두 아름다워 보이듯 그 반대도 같은 것이죠.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우리 내면의 역동은 <질투>의 화자보다 덜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화자의 훌륭한 점은 거기서 감정을 덜어냈다는 것인데 대신 <질투>는 독자의 몫이 됩니다.
'질투'가 무엇인지 144페이지 분량으로 정의한 것이 바로 이 소설 <질투>입니다. 멋진 작품입니다. 짝짝짝.
2025.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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