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에세이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에서 시작해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1920-1994)의 책을 벌써 일곱 권째 읽고 있는데 이번 책이 가장 읽기 어려웠습니다. 부코스키 역시 이 책을 가장 쓰기 어려웠던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1982년 출간한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입니다. 문단의 이단아로 거침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한 찰스 부코스키의 유년기 기억의 근원을 만날 수 있는 자전적 소설입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유일무이한 작가로 키워낸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부코스키가 이 책을 쓴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부코스키가 가혹한 유년기를 지나왔다는 것은 그를 애정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년기를 자전적 소설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연민 때문이겠죠.
(그래서 억울하면 당신도 글을 쓰라고 어느 작가가 말했나봅니다.)
나는 학교에 친구라고는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혼자 있는 편이 더 좋았다. 벤치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멍청해 보였다. (p35)
<호밀빵 햄 샌드위치>에도 역시 부코스키의 페르소나 '헨리 치나스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성장기인 셈이죠. 치나스키는 어린 시절 남다른 사고를 하는 아이였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멍청해 보이다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칭찬받고 사랑받는 유년기는 아니었겠다는, 그래서 외로웠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면서 나무랐지만 나는 아무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맞을 일은 앞으로 많이 있을 것이고 점점 더 자주 반복되겠지만 그날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진짜 이유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p49)
억울한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없이 치나스키는 거의 매일 아버지로부터 모진 매질을 당합니다. 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울부짖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는 항상 옳다는 식의 반응으로 일관합니다. 결국 자신은 입양아가 분명하다는 엉뚱한 결론에까지 이릅니다.
학교도 집도 친구들도 가족들도 치나스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치나스키에게 씐 악귀를 물리친다며 할머니가 등에 십자가를 꽂아 피투성이를 만드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런)
헨리 치나스키는 그러나 일상에서 거의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고난을 일과처럼 받아들입니다.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철학자 마냥 그들과 상황을 관조하는 모습에서 비정상적인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문체의 힘이겠지요.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p115)
어느 날 치나스키가 제출한 글짓기 숙제를 칭찬하며 다른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기까지 하는 선생님을 보며 치나스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자신의 삶이 더 쉬워지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역시 영특합니다.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읽으며 하늘은 위대한 인물을 내기 전에 그에게 고난을 준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치나스키의 유년기를 그저 고난으로 묶어 한 덩어리로 분류해 버리는 이 연결이 과연 옳은지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자전적 소설을 읽을 때 작품으로만 봐야지 작가와 엮지 말라는 조언을 어느 작가가 했었는데 엮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거의 치나스키 = 부코스키, 100%가 되어버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부코스키를 애정하기 때문이라 합리화해 봅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부코스키를 애정한건지.
2025.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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