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백민석(1971년생)의 실험적(!)인 장편소설 <교양과 광기의 일기>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의 제목처럼 교양인의 일기와 광기가 담긴 일기가 번갈아가며 쓰이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뒷 표지에서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기 뒷면에 아무도 모르게 광기 어린 한 소년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체 그 소년은 누구이며 왜 누군가의 일기 뒷면에 자신의 일기를 쓰는 걸까요. 흥미를 끌기 위한 것이겠지만 어느 정도 환상소설의 분위기도 풍기는 작품입니다.
<교양과 광기의 일기>를 끌고 가는 주된 서사는 40대 소설가인 '나'가 쓰는 교양 일기입니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일본 도쿄와 쿠바 아바나를 배경으로 87일간의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의 일기 뒷면에는 어느 10대 소년의 일기가 역시 번갈아 쓰이는데 <교양과 광기의 일기>에는 두 사람의 일기를 모두 합쳐 180개의 일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간혹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사실이 아닌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먹고살기 바빠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므로 삶이 되지 못한다. (p34) _10월 7일 자 10대 소년의 일기 中
10대 소년의 일기에서는 교양보다 충동성과 비현실감이 주를 이루는데 심하게는 퇴폐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이데아적인 무엇인가가 보입니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그녀에 대한 글을 써라. 어떤 도시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 도시에 대한 글을 써라. 글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해를 더해 사랑을 더 깊게 한다. (p87) _11월 1일 자 40대 소설가의 일기 中
소설가는 쿠바 아바나에 대해 사나흘 고심해 글을 쓰면서 그 도시에 더 많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씁니다. 스쳐지나가버릴 수도 있는 어떤 순간들을 붙잡아 내게 중요한 2인칭 대상이 되게 하는 방법 가운데 글쓰기만 한 것이 없죠. 역시 소설가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존 버거는 이렇게 말한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낸다.' (p142) _11월 23일 자 40대 소설가의 일기 中
눈에 보이는 기록만 믿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부터 현상 이면의 것들을 보기 위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기 뒷면에 '광기의 일기'를 써대는 10대 소년을 그는 보았을까요.
12월 21일자 10대 소년의 일기에서 둘은 마침내 마주칩니다. 두둥.
현상으로 드러나는 교양과 그 이면의 광기는 결국 하나입니다. 숨겨두었던 광기가 무르익어 교양이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025.6.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The River of Consciousness>을 읽고ㅣ신경과학 에세이 (6) | 2025.06.22 |
---|---|
나상호 교무 <큰길로 가라>를 읽고ㅣ원불교 설교집 (0) | 2025.06.21 |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 없는 세대>를 읽고ㅣ단편소설 (1) | 2025.06.19 |
외젠 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를 읽고ㅣ장편소설 (5) | 2025.06.18 |
찰스 부코스키 <창작 수업 Creative Writing Class>을 읽고ㅣ시집 (5) | 2025.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