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Bruno Schulz, 1892-1942)의 중단편 소설집 <브루노 슐츠의 작품집>입니다. 브루노 슐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폴란드어로 글을 쓰는 유대인이었고 독일어에 능통했으며 유대 문화에 빠져 있었지만 이디시어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국적이 여러 차례 바뀌는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하며 자신만의 비범한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브루노 슐츠 작품집>은 그가 1934년 출간한 첫 단편집 「계피색 가게들」과 1937년 발표한 「모래시계 요양원」이라는 중단편집을 합본으로 엮은 것으로 모두 스물 아홉편의 소설이 수록돼 있습니다.
1934년 첫 단편집의 표제작인 「계피색 가게들」은 꿈처럼 몽환적인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착각이 들게하는 작품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디즈니 영화 '코코'에서 본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습니다.
나는 하늘의 광채로 밝혀진 겨울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p75)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소년입니다. 저녁시간에 부모님과 극장에 갔다가 아버지가 지갑을 집에 놓고 온 바람에 발 빠른 주인공이 지갑을 가져오는 심부름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신이 난 소년은 마법에 걸린 듯 반짝이는 밤거리로 홀로 모험을 떠납니다.
이 진실로 고귀한 밤늦게 여는 가게들은 언제나 나의 열정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p76-77)
소년은 늦은 시간에 문을 여는 짙은 색 판자벽의 매력적인 가게들을 「계피색 가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게들은 먼 나라의 신비로운 냄새를 풍기는데 그곳에서는 마술 상자, 이국적인 벌레의 알, 쌍안경, 희귀 인쇄물, 비밀 출판물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날 밤 소년은 이 가게들을 구경할 기회를 얻은 것이죠.
그 가장 밝은 겨울밤의 빛나는 여행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천상의 색색가지 지도는 뻗어 나가 거대한 돔이 되었고 그 위에 천계 지형의 빛나는 줄무늬와 별들의 흐름과 소용돌이의 선이 그어진 환상적인 땅과 대양과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p83)
어린 시절에 혼자 밤 거리를 구경하는 일은 금지된 일이라 더 흥미로운 경험이겠지요. 아주 어릴 때 여행지에서 부모님과 야시장 구경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시기의 다른 기억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연 뚜렷하게 남아있는 추억입니다. 브루노 슐츠 역시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더듬어 이 작품을 썼을 듯합니다.
1년에 한 번뿐인 그런 밤에는 행복한 생각과 영감을 얻게 되고 시의 신성한 손가락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 눈 위에 은처럼 깔려 있던 것이 그 밤의 마법이었는지 새벽빛이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채... (p85)
「계피색 가게들」의 주인공은 아마도 밤새 모험을 이어간 듯합니다. 부모님이 부여한 임무는 이미 잊은지 오래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가보지 못한 장소들, 그리고 밤에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비로운 경험들이 소년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겠지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본 듯 기분 좋은 작품입니다.
2025.5.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 자크 상페의 「계속 버텨!」를 읽고ㅣ그림책 (6) | 2025.05.26 |
---|---|
JMG 르 클레지오 <성스러운 세 도시>를 읽고ㅣ단편소설 (0) | 2025.05.25 |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아포리즘 Kafka Aphorismen>을 읽고ㅣ에세이 (2) | 2025.05.23 |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ㅣSF 장편소설 (2) | 2025.05.22 |
로베르트 제탈러 <한평생 A Whole Life>을 읽고ㅣ장편소설 (0) | 202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