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대표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1888-1959)의 대표작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입니다. 1939년 출간한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에서부터 이어진 사설탐정 필립 말로 시리즈의 거의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 만년인 195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특히 <기나긴 이별>은 필립 말로 시리즈 중에서 단연 명작으로 꼽히는데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와 함께 하드보일드 3대 걸작으로도 불립니다. 시리즈의 초기작에서는 에너지 넘치던 청년이던 필립 말로의 40대 중반의 원숙한 면과 더욱 냉소적인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나도 꽤 냉정한 편인데 그 친구는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맑은 목소리와 예의범절 때문일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테니까. 여자가 말했듯이 버림받은 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p14)
사설탐정 필립 말로는 <댄서스> 앞에서 술에 잔뜩 취해 롤스로이스에 앉아 있던 테리 레녹스를 우연히, 처음, 만납니다. 젊지만 백발에 얼굴에 흉터가 있고 어딘가 사연 있어보이는 분위기의 그가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감각이 예민한 탐정에게 이유 없이 끌리는 남자,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죠.
함께 있던 여성에게 버림받은 테리 레녹스를 말로는 집에 데려다 재워주고 왠지 호감이 가는 그와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됩니다.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한 테리 레녹스는 엄청난 부를 가졌음에도 어딘가 불안정해보였고 그렇게 필립 말로는 그의 삶에 얽혀 들어갑니다.
다음번에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를 타고 있는 예절 바른 주정뱅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랴부랴 갈팡질팡 도망쳐야지. 스스로 만든 함정보다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 (p130)
과연 필립 말로가 다시 그 같은 상황을 만난다면 부랴부랴 도망칠 수 있을까요. 타고난 탐정의 DNA로 그러긴 어려워보입니다. 결국 필립 말로는 억만장자의 딸인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린 의문의 인물 테리 레녹스를 둘러싼 비밀을 캐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인들은 그런 느낌을 잘 표현했다. 젠장, 그 인간들은 모든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이별을 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 가네. (p551)
<기나긴 이별> 속 명언입니다. '이별을 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 가네.'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러,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이가 든 독자 역시 같은 운명이네요. 필립 말러는 이 소설에서 <기나긴 이별>을 조심스레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설탐정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사람이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가 될 수도 없는 데다 재미도 별로 없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이 일을 그만두고 그럴싸한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초인종이 울리고,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골칫거리와 새로운 슬픔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서 약간의 돈을 내민다. (p238-239)
40대 중반에 들어서는 경력이 탄탄하고 유능한 사설탐정이지만 필립 말로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탐정 일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수요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새로운 얼굴, 새로운 골칫거리, 새로운 슬픔'에 대한 필립 말로의 애정 덕분입니다. 나이가 더 들면ㅡ조금씩 죽어가다 보면ㅡ언젠가 의뢰인들과도 완전히 이별하는 날이 오겠지요.
2025.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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