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러시아 출신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1899-1977)의 장편소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입니다. 1941년 출간한 소설로 1940년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 영어로 집필한 첫 작품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으나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스무 살 무렵부터 러시아를 떠나 영국, 프랑스, 미국, 스위스로 망명하며 일생을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나보코프가 40세 무렵 인생의 전환점에 자신의 진짜 인생을 더듬어 보는 자전적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서배스천 나이트는 러시아계 영국 작가로 1899년 12월 31일에 태어나 1936년 사망합니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그 보다 6살 아래의 이복동생 V가 형의 전기를 쓰기 위해 과거의 행적을 좇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작가의 비서로 일하는 것과 작가의 일생을 기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p19)
V보다 앞서 서배스천 나이트의 비서 굿맨이 그의 전기를 발표했으나 V는 이 전기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왜곡됐다고 비판하고 나섭니다. 서배스천 나이트가 죽은 직후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시들기 전에 서둘러 시장에 내놓고 싶은 욕심(돈)으로 굿맨이 형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했을 리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형과 친밀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단편적인 기억만 갖고 있는 V에게 역시 서배스천의 일생을 기록하는 일은 도전입니다. V는 형의 지난 삶을 상상하며 그의 일생을 추적해 나가기로 합니다.
서배스천의 삶의 기조는 고독이었다. 운명이 친절하게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경탄스러울 정도로 위조하여 안락하게 해주려고 할수록 그는 그 그림에, 아니 그 어떤 그림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더 절실하게 의식했다. (p51)
마침 서배스천 나이트와 같은 해인 1899년에 태어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일부 투영하고 있습니다. 일생을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스위스를 떠돌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적응하며 잘 살아낸 자신의 삶을 말이죠. 아마 그 내면의 기본 정서는 서배스천 나이트와 닮은 외로움과 고독이었을 겁니다.
현재의 입술에서 과거를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 말라. 가장 정직한 브로커를 경계하라. 당신이 들은 것이 실제로는 세 겹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한 겹, 청자가 또 한 겹,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망자가 둘에게 숨긴 것이 또 한 겹, "서배스천 나이트 얘기를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진짜 누구일까? (p62)
존재와 현상에 관한 것은 결국 실재와 허구를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것을 V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의 전기조차 소설일 수밖에 없음을 V는 깊이 의식하면서 탐색을 이어갑니다. 이복형 서배스천 나이트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의 감정을 들여다봅니다. V의 자신의 시선으로.
나는 서배스천이다, 혹은 서배스천이 나다. 아니면 우리 둘 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다. (p240)
V는 서배스천 나이트의 내면을 상상하고 그의 과거를 추적하면 할수록 실재와 허구가 뒤섞여 그의 진짜 인생이 과연 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해석을 당하는 자, 해석을 하려는 자, 그리고 그 해석을 지켜보는 자, 이 모든 시선이 서배스천 나이트의 인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보코프의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에서는 절대적인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모든 것은 유동적이라는 가능성이 열린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4.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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