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 교수 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를 읽고
불교나 동양철학,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학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정작 동양인이고 한국인인 제가 이들 학문에 전혀 문외한이라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배워보려고 고른 책입니다.
불교대학 목경찬 교수의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입니다.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음 작용 간의 관계성을 밝힌 연기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새롭게 풀이한 십이연기, 삼법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및 업과 윤회의 참뜻'. 부제에서부터 낯선 용어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십이연기, 삼법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알파벳보다 한자가,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이 더 멀고 어렵게 느껴지네요.
개인적으로는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에서 기본적인 용어 몇 가지만 제대로 이해해도 큰 소득일 듯합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제 기준에서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세 가지 지식을 골라 정리해 봅니다.
첫 번째로 연기(緣起)에 대해 '세상만물은 서로 관계하여 일어나며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서로 관계하는 것의 대상이 외부에 있을 때를 외연기, 내부에 있는 것을 내연기라고 할 때, 불교의 핵심은 내연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 공부는 마음 공부입니다. 연기법은 바깥세계의 관계성에 중심을 두는 가르침이 아니라 마음 작용에 대한 관계성에 중심을 두는 가르침입니다. (p24)
이 해설에 대해 외연기는 주로 복잡한 내연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드는 데 쓰이며 연기의 본래 목적은 내연기에 있다는 미즈노 고젠의 저서 내용으로 부연합니다. 불교가 마음공부라면 서양 심리학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심리학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로 불법의 인증 기준이 되는 삼법인(三法印)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북방 불교에서는 열반적정)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교설이나 이론이 삼법인의 내용에 맞으면 부처님 가르침이고 맞지 않으면 마구니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p35)
부처님 근본 교설 가운데 하나로 삼법인(三法印)을 들어 설명합니다. 세 가지 도리에 따라 교설이나 이론을 인증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과 행위라도 그 속에 사랑과 평안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연상됩니다. 불교에서는 마귀를 마구니라고 표현하는군요.
ㅣ제행무상(諸行無常) 마음 작용으로 드러난 세상은 항상함이 없이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는 의미로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따른 변화라고 설명합니다.
ㅣ일체개고(一切皆苦)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ㅣ제법무아(諸法無我) 세상에 절대불변의 성질을 지닌 고정된 본체는 없으며 나의 마음 작용으로 연기된, 나에게 드러난 세상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ㅣ열반적정(涅槃寂靜) 알음알이와 번뇌같은 마음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온갖 분별과 괴로움이 소멸된 안온하고 고요한 경지를 일컫습니다.
세 번째로 돌고 도는 중생의 세계인 삼계 육도(三界 六道)와 깨달음의 세계인 정토(淨土)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분되는 삼계(三界)는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세계입니다. 사바세계라고도 합니다. '참아야 하는 세계'라는 뜻으로 감인토(堪忍土), 인계(忍界), 인토(忍土)라고 번역합니다. (p131)
중생(衆生)이란 업에 의해 거듭거듭 태어나 많은 삶을 산다는 뜻으로 이들이 사는 삼계(三界)는 크게 두 경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 다른 하나는 정신세계의 깊이라는 것인데 괴로운 상태는 지옥, 평온한 마음 상태는 하늘이라는 것인데 후자가 역시 더 받아들이기 수월합니다.
정토(淨土)는 업에 의한 생사윤회가 일어나지 않는 세계입니다. 정토에는 근심과 고통이 없고 다만 한량없는 맑고 깨끗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고 하여 극락(極樂)이라고 합니다. (p132)
정토(淨土) 역시 삼계(三界)와 같이 두 가지 입장에서 설명합니다. 실제 극락정토를 언급하는 경우와 마음가짐으로 정토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사라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내 앞에 펼쳐질 때 그 마음(청정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 바로 정토(청정한 국토)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교만이며 가장 큰 죄악입니다. 불교에서도 분별심을 내지 말고ㅡ분명 기독교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겠지만ㅡ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 단지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 환하게 명백하리라 _승찬 선사 「신심명」 (p134)
불교에서 말하는 '지극한 도'는 지금의 제 지식과 지혜로는 이해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네요.
2025.2.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피게니에 & 스텔라」를 읽고 (1) | 2025.02.26 |
---|---|
장가브리엘 코스 「색연필 Les crayons de couleur」를 읽고 (0) | 2025.02.25 |
마일리스 드 케랑갈 「닿을 수 있는 세상」을 읽고 (1) | 2025.02.23 |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을 읽고 (0) | 2025.02.22 |
윌리엄 하트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자유에 이르는 삶의 기술」을 읽고 (2) | 2025.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