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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마일리스 드 케랑갈 「닿을 수 있는 세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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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스 드 케랑갈 「닿을 수 있는 세상」을 읽고


예술가는 어떻게 삶을 꾸리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성해 나갈까요. 

 

프랑스 소설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Maylis de Kerangal, 1967)의 2018년 작품 <닿을 수 있는 세상 Un monde a portee de main>에서는 거의 실제와 가깝게 대상을 묘사해 내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 기법을 배우는 어느 20대 예술가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란?

 

그리고 젊은 예술가의 일과 사랑을 통해 마일리스 드 케랑갈은 이들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겠는지 묻고 있습니다. 독자로서는 <닿을 수 있는 세상> 속 인물들을 보며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지점을 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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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대리석 판들 쪽으로 다가가고 바라보고 손바닥을 펴서 대어 본다. 돌의 차가움 대신 색칠된 표면의 감촉이다. 더 다가가서 다시 바라본다. 정말로 그려 놓은 것이다. (p35)

 

스무살의 폴라가 학교에서 처음 마주친 트롱프뢰유에 대한 묘사입니다. 처음엔 진짜인 줄 알았다가 그 착시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그림. 앞으로의 인생에 커다란 이정표를 만난 듯한 폴라는 트롱프뢰유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행동을 개시하는, 시선이 뇌 속에 만들어 놓은 것과 유사한 이미지를 종이 위에 창조하는 것이다... 폴라의 눈이 반짝이고 그 순간 무언가가 폴라의 내면에서 열린다. 트롱프뢰유가 어쩌면 그림의 본질이라는 생각이다. (p59-60)

 

폴라는 학교가 내세우는 소신과도 같은 트롱프뢰유의 진면목에 대해 차츰 눈을 뜹니다. 보는 것, 자신의 오감으로 관찰하는 일이 예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자 본질이 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폴라의 말에 따르면 트롱프뢰유는 단순한 시각적 기술적 훈련이 아니라 사유를 흔들고 환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감각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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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흥분 상태는 결국 그녀의 명석한 통찰력을 흔들어 놓는다. 그녀는 불확실성이 자신의 삶의 조건이 되었고 불안정성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다. (p173)

 

경력이 쌓이면서 폴라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자연스럽게 일거리가 많아지고 경제적 관계가 점차 늘어나면서 폴라는 성공적으로 사회에 편입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돈을 벌면서 역설적이게도 폴라는 점차 취약해지고 고독해집니다. 

 

 

그녀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벌어졌고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이제 모든 게 투명하다. 진짜로 그리기, 진짜로 사랑하기, 진짜로 서로 사랑하기, 다 같은 거다. (p259)

 

그렇게 시간이 폴라를 성숙하게 했고 폴라는 젊은 예술가답게 다소 무디지만 착실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빚어나갑니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면 '궁극의 복제(p264)'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나스가 자신이 거절한 라스코 동굴 복제 작업을 폴라에게 제안하며 한 말인데 트롱프뢰유 기법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말은 없어 보입니다. 화가도 아니며 복원사도 아닌 그 중간 어느 지점쯤에 트롱프뢰유가 있습니다.

 

바로 다가갈 수 조차 없는 진짜 세상을 <닿을 수 있는 세상>으로 창조해내는 일. 예술가 폴라의 정체성 역시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지요.


2025.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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