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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화 역사 문학 미술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ㅣ화가의 작품과 생애 (ft.표현주의·상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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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ㅣ화가의 작품과 생애 (ft.표현주의·상징주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뭉크는 <절규>로 잘 알려진 표현주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입니다. 1863년 노르웨이 로이텐에서 출생하여 1944년, 80세에 노르웨이 오슬로(Oslo)에서 사망했습니다. 뭉크는 어렸을때부터 몸이 약해 작품에도 그 영향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생과 죽음의 문제, 인간 존재의 근원인 고독, 질투, 불안 등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좌) the-sick-child_1886 ㅣ (우) the-scream_1893


어릴적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정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뭉크(Edvard Munch)가 5살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는 것을 보았고, 여동생 소피는 14살때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충격적인 어린시절의 경험, 종종 혼란스럽고 괴로움 짙은 그의 감성 등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혔던 심리적 고통을 통해 뭉크의 작품은 발전했습니다. 실제 아픈아이(the sick child)의 여러 버전은 그의 여동생에 대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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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Edvard Munch)는 18세의 나이에 첫 그림을 판매하고, 오슬로에서 개인 전시회가 개최된 최초의 노르웨이 예술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 뭉크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했습니다. 

 

작품 '절규'(The Scream_1893)는 오슬로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느낀 감정을 모티프(motif)로 하고 있습니다. 뭉크는 훗날 "해가 질 때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로 물들었다. 나는 멈추고 울타리에 기대어 두려움으로 떨었다. 그때 나는 자연의 거대하고 무한한 비명소리를 들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뭉크의 심리적인 고통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으며, 지금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도 그 절규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좌) spring-plowing_1916 ㅣ (우) the-wave_1921


뭉크(Edvard Munch)는 1892년 베를린 미술협회에 초청되어 여러 작품을 전시했으나 당시 이질적인 표현으로 비평가들의 독설을 듣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몸이 약했으며, 아픈 가정사를 겪은 뭉크는 외로움과 사람들의 비평을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1982년부터 1908년까지 뭉크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보냅니다.



1913년 이후 뭉크(Edvard Munch)는 작가로서 인정받는 성공적인 삶을 살게되지만 뭉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작품은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오슬로의 의회, 시청, 극장에 초청받아 전시되었고, 파리, 비엔나, 프라하, 뮌헨, 드레스덴, 코펜하겐, 영국, 미국에서도 전시되게 됩니다.  


(좌) red-virginia-creeper_1900 ㅣ (우) the-girls-on-the-bridge_1901


1909년 뭉크(Edvard Munch)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과 정서는 종종 정신질환과 연결이 되는 것을 봅니다. 뭉크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후 뭉크의 그림은 자연, 동물 등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듯합니다. 뭉크의 풍경화는 색채나 표현기법이 몽환적인 느낌을 줍니다. 


(좌) red-house-and-spruces_1927 ㅣ (우) starry-night_1924


뭉크(Edvard Munch)는 1944년 오슬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후 1천여점의 그의 작품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노르웨이 정부에 기증됩니다. 노르웨이 정부는 뭉크 미술관을 짓고 그가 기증한 대부분의 작품을 전시하여 뭉크의 독특한 스타일을 전세계에 소개하고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참고: wikiart.org


2022.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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