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1967-)의 첫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작가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낯선 언어 이탈리아어로 쓰였습니다. 첫 산문집을 외국어로 펴낸 작가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줌파 라히리는 글을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p73)고 말합니다. 자유롭고 친숙한 언어인 영어로 글을 쓰는 것보다 낯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그래서 감각을 더 예민하게 깨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줌파 라히리의 이 산문집은 적잖은 공감대가 될 듯합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면서 줌파 라히리는 늘 포켓사전을 갖고 다닙니다.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p18)
모국어인 영어가 부모라면 외국어인 이탈리아어는 형제 정도 되겠지요. 시적인 비유를 들며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작가로서 난 이렇게 열심히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창피하지만 나는 계속한다. (p56-57)
이탈리아어 선생님에게 자신이 열심히 쓴 글을 보여주면 그 글은 빨간펜 첨삭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치열하게 배우고 쓰고 이탈리아어로 단편을 써내며 그녀는 그 언어에 대한 원인 모를 충동을 해소해 나갑니다.
모국어가 영어인 줌파 라히리에게 영어는 고압적이고 자신만만한 정복자와 같고 이탈리아어는 품에 안아 지켜야 할 갓난아기와도 같습니다. 이처럼 낭만적인 은유를 들며 이탈리아어를 성장시키고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만들어갑니다.
자신을 네 가지 형태로 창조했던 페르난두 페소아가 생각난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통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페소아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p136)
줌파 라히리는 산문 마지막 즈음에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여러 권 읽은 독자로서 그녀의 짐작이 꽤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술가로서의 섬세한 내면을 지닌 작가의 새로운 도전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통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25.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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