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태생의 미국 시인이자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1920-1994)가 말년에 쓴 일기를 모아 엮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입니다. 원제는 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the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으로 점심 먹으러 나간 선장이 바로 이 말년 일기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찰스 부코스키일 테지요.
찰스 부코스키는 미국 언더그라운드의 전설로 불리는 작가로 주로 술과 도박, 세상의 부조리, 가진자에 대한 조롱, 거대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주제로 삼아 글을 썼습니다. 자연스럽게 주류 문단으로부터는 통속성을 지적당하지만 당시 유럽과 미국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이런 괴짜로운 작가들 참 좋습니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에 수록된 찰스 부코스키의 일기는 1991년 8월 28일부터 1993년 2월 17일까지 쓰인 것으로 책은 그가 죽고 4년 뒤 출간됩니다.
이 책에는 일단 괴짜 작가의 에세이가 주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돈 문제는 딱 두가지다. 너무 많거나 너무 없거나. (p11)
찰스 부코스키는 이 일기를 쓰던 시기에 매일 경마장에 가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돈을 몽땅 잃은 도박꾼들에 대해 언급하며 다행히 자신은 돈을 좀 더 소중히 여기는 편이라 여전히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찰스 부코스키는 거의 평생토록 돈이 없었다고 고백하는데 세계적인 작가라고 모두가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건 아닌가 봅니다.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p17)
일흔이 넘은 찰스 부코스키에게 죽음은 멀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라며 실제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염병, 죽음은 연료 탱크 속 휘발유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물면 여긴 쓰레기로 꽉 찬다. (p42)
찰스 부코스키의 일기 중 어딘가 불교 교리가 떠오르는 지점이 간혹 보이는데 실제 역자 후기에 보면 찰스 부코스키는 불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속 썪은 빵이 껍질은 멀쩡한 거처럼 상류층은 여전히 흥청거리며 산다. 놀랍지 않은가? 몇백만 달러는 예사다. 부자들은 언제나 끄떡도 없다. 그들은 사회체제를 젖 짜듯 쥐어짤 방도를 항상 찾아내 왔으니까. (p56)
20세기 말 미국 역시 경제문제가 심각했는데 그가 경마장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또 돈을 잃는 상황 역시 같은 맥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찰스 부코스키는 70세부터 월 943달러의 연금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늙은 작가가 스웨터를 껴입고 앉아 컴퓨터 화면을 흘겨보며 인생에 관해 쓰고 있다. 우린 도대체 얼마나 거룩해질 수 있을까?" (p72)
71세의 부코스키의 일기에는 삶보다 죽음을 훨씬 친숙하게 여기는 만년의 작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부코스키의 일기 속 이야기는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겠지요.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에는 'Don't Try'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불교의 공(空) 사상과 닿아있네요. 간혹 그리스도를 찾기도 한 그는 지금 이 세상 어디엔가 환생해서 와있을까요, 아니면 천국에 올라가 있을까요. 찰스 부코스키를 추모하며...
2025.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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