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인 줄 알았는데 자전 에세이였네요.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년생)의 <이스탄불 Istanbul>입니다. 2003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자신이 태어나 성장하고 작가가 된 후에는 늘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이스탄불에 대한 오르한 파묵의 감상과 도시의 변천사를 개인사와 더불어 조밀하게 엮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전 에세이임에도 소설을 한 편 읽는 듯합니다.
<이스탄불>에는 오르한 파묵이 소장한 개인 사진과 이스탄불 도시의 사진 200여 점이 함께 수록돼 있어 글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 오랜 세월 동안 내 뇌리의 한 구석에 이스탄불 골목들 중 한 곳에 우리 집과 비슷한, 아니 나와 꼭 닮은 또 다른 오르한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오해, 우연, 장난 그리고 두려움으로 짜인 긴 세월 끝에 내 마음속에 스며든 것 같다. (p15)
<이스탄불>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다 자란 이후에까지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어린 오르한 파묵의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벌써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눈망울이 인상적입니다. "이 아이는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라고 사진 밑에 써두고 싶네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후에 살 수 있는 두 번째 삶은,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뿐이기 때문이다. 독자여, 이는 당신의 집중에 달려 있다. 나는 당신에게 진솔함을 보여 줄 테니, 당신도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길. (p23) _1장 또 다른 오르한 中
<이스탄불> 도입부에서 소설보다 더 적나라할 수밖에 없는 자전에세이를 쓰는 오르한 파묵의 섬세함과 조심스러움이 묻어납니다.
행복한 어린 시절에 재미로 시작한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이유마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잃어버렸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강한 불안감의 파도가 서서히 나의 영혼을 포섭했다. (p467)
오르한 파묵은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화가의 꿈을 잃고 건축학도가 되었지만 대학 2학년 무렵부터 공부에도 흥미를 잃습니다. 20대 초반의 저자는 깊고 치열한 내적인 혼란 끝에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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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넌 대학을 마쳐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는 먹고살지 못할 테니 일을 해야겠지... 그들은 너 같은 아이가 화가가 되겠다며 대학을 그만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가 정신이 나갔다고 입방아를 찧을 거야... 절대 그만두면 안 돼.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지." / "싫어요." (p492-493) _37장 어머니와의 대화 中
이스탄불에서도 부유층에 속했던 집안에서 자란 오르한 파묵이 대학을 중퇴하고 화가나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애원하다시피 그를 말립니다. 그 시기의 이야기가 37장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작가의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언급하며 대학 졸업은 하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오르한 파묵의 선택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지난 일들이 훈훈한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스탄불>이라는 자전에세이 역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겠지요.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2025.5. 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내 마음의 낯섦」을 읽고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내 마음의 낯섦 Kafamda Bir Tuhaflik」을 읽고 마음은 단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고, 같은 상황이라고 같은 마음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준 작품입니다. , 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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